책소개
전상국의 중·단편소설들을 모은 이 책에는 표제작이기도 한 작품 「지빠귀 둥지 속의 뻐꾸기」를 포함한 네 편의 중편과 「관심」을 포함한 두 편의 단편소설이 수록되어 있다. 작품 발표 시점을 보면, 「외딴길」(1981)과 「관심」(1984)을 뺀 대부분의 작품들은 1987년~1988년 사이에 발표된 것들이다. 그가 1968년 등단 이후 잠시 공백을 두었다가 1974년부터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재개했다는 전기적 사실에 더하여 한국전쟁의 상흔을 그린, 명실공히 그의 대표작이랄 수 있는 중편 「아베의 가족」이 발표된 때가 1979년이고 악의 탐구를 통한 알레고리적인 현실 비판의 작품인 「우상의 눈물」이 1980년 작임을 고려하면, 이 작품집에 수록된 작품들은 시기적으로 작가의 중기 소설들로 볼 수가 있겠다. 이 책에 수록된 작품들은 그 내용 면에서 볼 때 「아베의 가족」의 연장선에 놓여 있으며, 또 그런 시각에서 이해해야만 작가의 문학적 탐구의 참모습을 분명히 확인할 수가 있다. 특정적으로는 「지빠귀 둥지 속의 뻐꾸기」가 그러한데, 시각을 조금 더 넓히면 이 작품 외의 다른 중편소설들 또한 「아베의 가족」의 자장에 놓여 있다고 볼 수 있다.
목차
지빠귀 둥지 속의 뻐꾸기
투석
썩지 아니할 씨
외딴길
관심
잃어버린 잠
해설 | 전쟁의 상처를 바라보는 전상국의 소설적 방법론 | 김경수
작가의 말
작가 연보
저자
전상국 (지은이)
출판사리뷰
「지빠귀 둥지 속의 뻐꾸기」는 38선 접경 지역의 마을로 이제는 수몰지구가 되어버린 춘천 부근을 배경으로 한다. 외국인과의 사이에서 아비가 누구인지 모를 혼혈아를 가진 수지의 엄마, 그리고 결국은 아비가 있는 미국으로 입양된 혼혈아 수지 등, 이 소설은 여러 면에서 「아베의 가족」과 닮아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전작 「아베의 가족」의 단순한 재편이나 연속이 아니라 차라리 그것의 역전 내지는 전도라고 하는 편이 타당할 것이다. 전작 「아베의 가족」에서 아베를 선천적인 기형으로 설정해 아예 발언권을 주지 않았던 작가는, 이 작품에서는 아베의 후신인 혼혈아 수지에게 발언권을 주어 그녀의 시각에서 동포들로부터 민족의 순혈을 더럽힌 죄악의 씨앗으로 손가락질 받았던 어머니와 자신의 삶에 대해 당당한 입장을 피력하도록 하고 있다. 미국에 입양된 이후 수지는 자기 어미가 자기에게 보여주는 종족 보존 본능이 오히려 자신에게 그늘을 덮어씌우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수지는 자신의 어미를 사로잡고 있는 단일민족이라는 환상이 초래한 운명을 생각하고, 바로 그것이 자식마저도 그런 그늘로 끌어들이려는 일종의 광기로 발현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수지는 지빠귀 둥지에 자신의 알을 낳아 다른 새로 하여금 자신의 새끼를 기르게 하는 뻐꾸기의 생리에 비유하여 자신은 “나는 뻐꾸기 새끼예요. 비록 흰배지빠귀 둥지에서 부화돼 길러졌다 해도 그 흰배지빠귀를 어미로 착각하는 일로 또다시 그 여자처럼 자학의 응달 속에서 살고 싶진 않아요”라고 냉정하게 자신의 입장을 정리하고 어미와의 관계에 종지부를 찍는다. 성폭행으로 태어난, 그리고 성장 과정 내내 순혈주의의 신화 속에서 혼혈을 타자화하는 한국의 풍토에서 자라난 수지와 같은 인물이 혈연은 우연적일 결과일 뿐이라며 자신의 정체성을 독립적으로 인식하고, 나아가 자신의 어미도 그런 혈연의 굴레에 사로잡혀 살아야 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당돌할 만큼 당당한 자기 인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에 수록된 전상국의 나머지 중편소설들 또한 「아베의 가족」과 「지빠귀 둥지 속의 뻐꾸기」의 연장선에 놓여 있다. 「투석」과 「썩지 아니할 씨」, 그리고 「외딴길」과 같은 세 편의 중편소설에서 작가는 「아베의 가족」이나 「지빠귀 둥지 속의 뻐꾸기」에 나오는 비운의 여성들과는 대척적인 자리에 놓이는 일군의 가해자들에 초점을 맞춰 그들의 삶을 추적해 들어간다. 그들은 전쟁 시절 빨갱이들을 여럿 죽인 기억을 가지고 있는 노인(「투석」)이라든가 전쟁통에 미친 척 연기를 해 살아남은 뒤 온 집안을 망가뜨린 망나니와 같은 인물(「썩지 아니할 씨」), 그리고 일제 때부터 줄곧 악의 화신처럼 행동하고 급기야는 죽으면서까지 혈족들에게 경제적인 피해를 떠안기는 만주 할아버지(「외딴길」)와 같은 인물들인데, 인물 설정 면에서 보자면 외견상 이런 인물들의 이야기는 아베나 수지의 이야기와 무관한 것으로 보일지 모르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전쟁이 여성들에게 가할 수 있는 최고의 비인간적인 악행이 성폭행이라고 본다면, 전쟁과 무관하게 살아가던 남성 인물들을 생존에 급급한 나머지 그 어떤 그악스러운 짓이라도 해서 살아남도록 다그쳤던 그 광기를 그들에게 가해진 전쟁의 폭력으로 볼 여지는 충분하기 때문이다.
이 세 편의 중편소설에서 다양하게 변주되는 문제적 인물들의 사악한 행위는 1980년대 전상국 소설의 또 하나의 성취였던 「우상의 눈물」과도 연결되는 것으로 보인다. 가난과 아이다운 권력욕만으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기표라는 인물의 악마성에 더해 그보다 한층 위의 통치욕에 내재된 악, 그리고 그것들을 포괄하는 사회적인 악의 존재를 동시에 문제삼고 있는 「우상의 눈물」이 선과 악이라는 인간 삶에 대한 보편적 탐구의 일환임은 분명하지만, 그런 상황 또한 전쟁이란 부조리한 상황의 연장으로 볼 수 있을 공산 또한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전상국이 탐구해 들어간 전쟁 이야기의 효용이며 그가 줄곧 천착해간 소설의 자리는 바로 이런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이런 면모야말로 분단의 현실을 살도록 운명 지어진 이 땅의 작가들이 회피할 수 없는 소설의 한 특징일 것도 같다. 전상국의 이야기 문법의 이런 특징이 이 책에 수록된 작품들 외의 다른 작품들과 맺는 상관성 속에서 상세히 해명된다면 우리는 그의 소설의 성취가 갖는 의미를 보다 풍부하게 이해하게 될 것이다.
작가의 말에서
“1985년 서울 탈출, 신들린 듯 고향 산천 구석구석을 섭렵하는 과정에 만난, 이 시대를 천형으로 사는 사람들 이야기를 나름의 순도 높은 디테일로 형상화한 중편 넷, 단편 둘 등 여섯 편의 작품을 모았다. 귀향, 그때의 그 넘치는 마음으로 ‘중단편소설 전집 7’을 묶는다.
오래전 발표한 작품을 다시 읽으며 두어 군데서 울컥했을 정도의 엷은 감성 톤으로 빚은 중편 「지빠귀 둥지 속의 뻐꾸기」는 실제 인물을 모델로 한 소설 쓰기가 작가의 상상력을 얼마나 기죽이는가 하는 걸 절감한 작품이다. 그 골짝, 그네의 무덤 앞에서 발상한 작품이라 감회가 각별하다.
중편 「투석」은 양구 선사유적지에서 우연히 손에 쥔 돌멩이(찍개) 하나를 오래 바라보는 중에 구상한 작품으로 독자의 몫 남기기, 곧 이야기 추리의 긴장을 글쓰기의 즐거움으로 삼았던 기억이 새롭다. 중편 「썩지 아니할 씨」와 「외딴길」 등 두 편의 중편 역시 대책이 없는, 그래서 별나게 살 수밖에 없는, 그러한 극한 혐오 캐릭터 탐구로 글쓰기의 신명을 찾았던 작품들이다.
「관심」, 「잃어버린 잠」 등 두 편의 단편은 그 시대 지식인의 자기성찰 모드로, 소설은 돌아봄, 곧 반성으로서의 언어 예술이란 생각 쪽에 힘을 모았던 작품들이다.
때로 소설은 칼이다. 흉하고 불편한 껍질을 벗겨내 그 환부를 파헤쳐 도려내는 그런 것. 그러나 작가는 그 칼을 쓰는 사람이 아니라 독자의 취향에 맞는 그런 것을 만들기 위해 기찬 창의의 신바람으로 풀무질을 하는 도공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