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요시모토 바나나, 2000년 작. 일상에 묻혀 기억 저편으로 밀려나 있던 몸의 감각이 어느 날 불쑥 일상의 기억으로 되살아나는 순간, 그 찰라를 잡아낸 글을 모았다.
주인공인 나()는 앞마당을 가득 메운 알로에의 왕성한 식물성에 데어, 조만간 뿌리채 없앨 생각을 한다. 하지만, 병상에 누운 할머니는 링거 주사 바늘 때문에 시퍼렇게 변해버린 손을 내밀며 더듬더듬 이렇게 말한다. "알로에가, 자르지 말라고, 하는구나. 알로에가, 여드름도 상처도 치료하고, 꽃도 피울 테니까, 자르지 말라고... 알로에 하나를 구해 주면, 앞으로 많은, 여러 장소에서 보는 알로에도, 너를 좋아하게 될 거다. 식물끼리는 다 이어져 있거든." 가늘고 토막난 목소리로,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할머니의 그 말에 나는 섬뜩하다. 하지만 할머니의 장례식을 치른 그 해 겨울, 나는 어느 시골 민가를 지나다가 어떤 부드럽고 정겨운 기운이 몸을 감싸는 듯한 느낌을 받고 주위를 둘러본다. 소박한 민가의 마당 가득, 소름이 끼칠 정도로 무성하게 자란 알로에 무리... 햇볕을 받아 한껏 잎을 뻗친 알로에는 우둘투둘 빨간 꽃을 피우고는, 살아있음의 기쁨을 마음껏 나에게 전하고 있었다.
여기저기 흥미거리가 생기면 놀라운 집중력으로 끝장을 보고야 마는 남자친구. 재주는 많으나 가난한 자의 길을 거침없이 선택하며 사는 남자친구가 나(『지는 해』)는 불안하지만, 상당히 벌이가 괜찮았던 아르바이트를 때려치고 그를 따라 호주에 올 만큼 그에게는 나를 끄는 마력이 있다. (그는 현재 서핑에 미쳐있다). 나름대로 착실히 쌓아올려왔던 내 초촐한 인생을 한번에 팽개칠 만큼 강렬한. 하지만 나는 이내 그 모든 것에 싫증이 나버린다. 늘 뭔가에 몰두에 있는 사람과 사는 일상, 나는 뭔지 모르게 서글프고 분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던 어느 저녁, 친구를 만나러 택시를 타고 가던 길.나, 임신했나 봐! 돌연 떠오른 생각! 순간 정체되었던 도로가 뚫리고 차가 덜컹 움직이며 속력을 내기 시작하자, 나는 갑자기 재미있는 요소는 하나도 없는데 기뻐하라!고 나를 부추기는 본능의 소리를 듣고 어쩔 줄 몰라한다.
과거의 시간과 사물, 그리고 내밀한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짤막하고 상큼한 단편 13편을 만나볼 수 있다.
목차
. 초록 반지
. 보트
. 지는 해
. 검정 호랑나비
. 다도코로 씨
. 조그만 물고기
. 미라
. 밝은 저녁
. 속내
. 꽃과 비바람과
. 아빠의 맛
. 사운드 오브 사일런스
. 적당함
_ 작가의 말
_ 옮긴이의 말
저자
요시모토바나나 저자(글),김난주 번역
출판사리뷰
상처와 치유, 상실과 따뜻한 희망을 이야기해 온 요시모토 바나나의 최신작 『몸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가 민음사에서 출간되었다. 까맣게 잊고 있던 소중한 기억,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자기의 진짜 속마음이, 사실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몸에 기억되어 있다는 바나나의 생각이 짤막하고 상큼한 13편의 단편에 담겨 독자를 찾는다.
너무나도 익숙해서 잊혀진, 사소하지만 아주 소중한 감정들
“알로에가, 자르지 말라고, 하는구나.” 혼자 살던 할머니는 죽기 직전 이렇게 말한다. 식물의 생명과 교감을 나눴던 따뜻한 마음을 가진 할머니로부터 ‘내’가 물려받은 힘에 대한 이야기 「초록 반지」, 어딘가에 정착할 생각 없이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는 남자 친구의 인생에 휘둘리면서 고민하지만, 결국엔 그의 아기를 갖고 생명의 숨결을 느끼며 기뻐하게 되는 작은 이야기 「지는 해」, “멈추지 않는 시간은 아쉬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름다운 순간을 하염없이 품기 위해 흘러간다.”라고 말하며 인생의 첫 기억을 노래한 「검정 호랑나비」, 이십 대 직전에 찾아오는, 하늘에 걸린 무지개처럼 잠깐 빛나는 예민한 감수성의 시기에 맞은 특이한 만남을 그린 「미라」 등 『몸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에는 마음과 몸, 사람과 풍경이 하나가 된,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는 단편들이 잔잔하게 떠올라 있다.
그렇게 앞서 잃어버린 광경만큼은 마치 밤의 산길 속 불빛처럼 선명하게 마음에 새겨졌다. 전등 빛에 비친 통나무집 탁자를 둘러싼 가족. 텔레비전을 끄면 그다음은 나무들이 흔들리는 소리뿐. 한밤에는 더욱 어둡다. 잠든 동생의 숨소리, 아빠가 코 고는 소리, 엄마의 귀밑머리, 어둠에 옹기종기 기댄 어떤 가족……. ―「아빠의 맛」p129
이런 아기자기한 이야기들 사이에는 톡톡 튀는 다채로운 단편들도 숨어 있다. 아홉 살 때 알코올 중독인 엄마에게 납치당했던 사건과 그때 느낀 애틋하고 슬픈 감정을 그린 「보트」, 세탁기 뒤에 사는 무엇과 고요하게 생활하는 사람, 빌딩과 빌딩 사이의 조그만 화단 같은 사람 다도코로 씨의 이야기 「다도코로 씨」, 열다섯 살이나 터울 진 언니, 할아버지 할머니뻘인 부모님과 함께 소박한 삶을 꾸려나가는 주인공이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눈치 채고도 달짝지근한 봄꽃 향기 속에 그대로 묻어버리는 이야기 「사운드 오브 사일런스」 같은 단편들에선 그녀만의 독특한 감성이 묻어난다. 『몸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에서 독자는, 한층 차분해진 목소리와 바나나 특유의 아름다운 문장으로 그려내는 긍정적이고 밝은 13명의 매력적인 주인공을 만나게 된다.
몸이 떠올리는 아름다운 기억의 조각, 오늘을 살게 하는 힘이 되는 이야기
이 소설에서 요시모토 바나나는 “사람의 몸과 마음이 자신들이 아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정보를 발신하고 수신한다는 것만은 확실한 듯하다. 그 신비로운 색채는 자신이 벌거벗고 있는 듯한 감각으로 나를 소스라치게 하고, 때로는 위로하고 가슴을 찡하게도 한다.”(「사운드 오브 사일런스」, p140~141)라고 하며 새로운 몸의 기능을 제시한다. 그녀가 말하는 것은 사소한, 그냥 지나쳐버리기 쉬운 우리와 우리 주변의 작은 이야기들이다. 삶의 물살에 휩쓸려 어딘가로 열심히 달려가면서 잊어버리는 빛나는 순간과 기억의 조각은, 때로 그 삶의 거친 물살에서 우리를 살아남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그리고 그걸 일깨우는 것은 바로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우리의 몸’이다.
우리는 스트레스가 쌓이면 이렇게 곧잘 드라이브를 하고, 서로 아무 말 없이 앉아 있는다. 가끔 투덜투덜 푸념을 늘어놓으면 농담으로 되받는다. 그러다 보면, 이렇게 기억의 깊은 곳에서 도움이 될 만한 일이나 따스하게 기운을 북돋는 일이 떠오르곤 한다. 우리는 그런 식으로 많은 것들을 풍경 속에 털어놓는다. 그리고 온천에 들르면, 참 멀리도 왔다고 말하면서 노천탕에 몸을 담그고 밥을 먹고 맥주를 마시고, 또 노천탕에 몸을 담그고는 축 늘어져 도심으로 향하고 졸린 눈으로 헤어진다. 그러고 난 다음 날에는 어린 시절처럼 말똥말똥하게 눈이 떠진다.
말하지 않아도 좋은 친구는 그리 많지 않다. 일단 억지로 얘기하기를 그만두면, 몸이 오랜 세월에 길든 서로의 리듬을 마음대로 새겨준다. 그러면 대화는 느긋하고 매끄럽다. ―「검정 호랑나비」p51
살아 숨 쉬는 동안 기억이란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법이다. 그 기억은 세월의 힘에 밀려 희미해졌다가도, 감각이 그때를 되새기는 순간 지금으로 환원된다. 바쁜 일상에 묻혀버리는 많은 것들, 시간에 밀려가 버린 반짝이던 추억이 어느 순간 아, 하고 되살아나는 경험을 해본 이라면 이러한 그녀의 이야기에 미소 지을 것이다. 무심히 지나치기 쉬운 나의, 또 내 이웃의 에피소드들은 바나나의 목소리에 실려 이것을 듣는 독자에게 오늘을 살게 하는 힘이 되어준다.